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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residentadvisor.net/feature.aspx?2104

 

페스티벌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국내에서도 진행중인 글로벌 게더링이나 울트라 페스티벌, 아니면 섬머 소닉이나 아예 해외의 투모로우랜드, EDC 등의 대형 페스티벌에 가기 위해 매년 용돈을 모으고 있을지 모릅니다. 혹은 해외의 Sonar, ADE, MUTEK같은 페스티벌 소식을 체크하며 올해는 어떤 기술과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도 있구요. 페스티벌의 역사를 외우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러브 퍼레이드를 비롯한 해외의 여러 역사적인 페스티벌과 그 사건들을 기억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가끔 SNS에 화려한 라인업의 페스티벌이 올라오면 그게 어디서 하는 것인지부터 확인해보곤 합니다. 그러다보니 가끔씩 그런 궁금증이 들기도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페스티벌은 언제부터 시작했으며 어디서 온 것일까?

 

일반적으로 전자 음악 페스티벌의 기원은 90년대 영국의 아웃도어 레이브로 이야기되고는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확히 그게 어디서 어떻게 왔으며, 특히나 물건너 다른 동네의 페스티벌이 어떻게 그 과정을 거쳐 현재 이 시장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접근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여기 RA의 편집자 Luis-Manuel Garcia가 쓴 글을 통해 우리가 즐기고 있는 페스티벌이 어떻게 시작되고, 변화되었는지를 확인해봅시다. 우리의 실질적인 궁금증에 모두 만족하지는 못하겠지만, 이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해보면 전자음악, 나아가 현재 음악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페스티벌 자체의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원본 : A pre-history of the electronic music festival

http://www.residentadvisor.net/feature.aspx?2104


 

세계적인 페스티벌이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우리는 그 페스티벌이 어디서부터 지금 여기에 이르렀는지를 잘 알지 못한다. 지난 칼럼에 이어, RA의 편집자 Luis-Manuel Garcia는 이 페스티벌 문화의 뿌리를 찾기 위해 짐을 쌌다.



 

2006년 4월로 돌아가보자, 프랑스의 듀오 다프트 펑크는 코첼라 페스티벌의 첫 날 밤을 마감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무대는 엄청난(face-melting) 비주얼 장치를 음악과 함께 공급하기 위한, 조명과 비디오로 이루어진 거대한 피라미드였다. 이를 뒤따른 것은 다프트 펑크의 엄청난 히트곡으로 이루어진 역동적이고 현기증 나는 매쉬업이었고, 이는 시각적 요소들과 함께 잘 짜여진 화술(내러티브)로 알차게 구성되어있었다.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훗날 그 무대에 마음이 움직였다고 했다. 'disco sucks'와 기타-록 순수주의파, 이런 인식이 가득한 미국에서 다프트 펑크의 2006년 코첼라 무대는 많은 경험의 변화를 느끼게 했다. 그리고 갑자기 인디록 팬들은 The Postal Service의 무대가 끝나자 이제 막 공연을 한 Justice나 Deadmau5의 무대에 가 보기 시작하며, 모든 전자음악이 다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8년 후, 이제 전자 음악 페스티벌은 매주마다 진행되는 주말행사처럼 보인다. 또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은 이 전자 음악 페스티벌의 가장 큰 시장 중 하나가 되었으며, 이 불꽃놀이 파티를 'EDM 페스티벌'이라 부르게 되었다. 동시에 '콘서트 비주얼' 기술은 이제 폭넓게 인정을 받고 있으며, 클럽과 페스티벌 문화와 함께 뭉친 '엄청난 문화'는 일렉트로닉 음악 퍼포먼스를 음악과 함께 더욱 시각적인 요소로 바꾸어놓았다.

 

아웃캐스트가 올해의 코첼라에서 다시 뭉쳤을 때, 일부는 EDM의 영향력이 페스티벌에서의 관객의 기대를 바꿔놓았다며 이를 비난하기도 했다. 그리고 Seth Troxler는 최근 전자 음악과 클럽 문화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러한 EDM 페스티벌이 세대간 논쟁에 불을 지핀다고 비난했고 Laidback Luke가 그에 답변한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걸 어떻게 여기는걸까?

 

코첼라 2006은 확실히 전자 음악에 대한 주류 문화계의 인식을 바꾸는 지점이었지만, 페스티벌은 2010년 미국에서 무언가 일어나기 전까지 그렇게 전자 음악에 치중하지 않았다. 그 이후, 그들은 문화적으로 의미있고 돈 되는 산업으로 이를 성장시켰으며 이것이 글로벌 축제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거의 새로운 발명품이고, 어떤 미국의 전자 음악 페스티벌 -DEMF/Movement in Detroit and WMC in Miami- 은 오히려 그 이전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90년대의 세계적인 레이브 씬과 함께 중첩되는 전자 음악 페스티벌의 넓은 역사에 속한다.

 

마찬가지로, 전자 음악 페스티벌은 음악 축제의 긴 역사의 일부이며 이 역사는 20세기, 아니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길을 따라 많은 변화들이 있었고, EDM 페스티벌의 순환은 이제 전의 것들과 너무 달라졌다. 그래서 오늘날의 이 축제들은 어디서 튀어나온걸까? 누가 이걸 이렇게 바꿔놨을까?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얻고 잃은 것일까?









 

기원을 추적하다

 

당신이 생각하는 "음악 축제"에 의하면, 당신은 매우 멀리서부터 온 이 발전을 추적할 수 있을지 모른다. 특히 당신이 음악과 전통 민속[folk]의 결합(봄 축제, 수확제, 성인식, 종교 축제같은 것들)을 포함할 수 있다면. 그러나 엔터테인먼트는 상용화되었으며, 엔터테인먼트+투어 형식의 음악 페스티벌은 - 티켓을 사고 아티스트의 목록을 확인하고 이 축제[playbill]를 광고하고 높은 값의 음료와 음식 값을 지불하는 - 19세기 클래식 음악 축제와 전후 20세기의 재즈 페스티벌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19세기 초반, 중산층은 성장하며 '고급 문화'와 '좋은 교육'에 대한 새로운 관념을 개발하고 있었고, 캐논으로 비롯된 '좋은' 음악가들의 설립과 성장에 흥미를 보였다. 처음으로, 형식이 만들어지기 몇 몇 세대 이전에 시행된 클래식 공연은 1829년 바흐[J.S. Bach]의 음악을 연주한 독일 작곡가인 펠릭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과 바르톨디[Bartholdy]의 콘서트에 의해 조직되고 실행되었다.

 

나머지 19세기 동안, 이 음악 축제의 모습은 유럽 주변에서(특히 영국과 독일) 개발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종종 바흐, 슈바르츠, 헨델, 하이든과 모차르트같은 특정 작곡가의 작품에 전념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아름다운 전원 환경이 있는 마을에서 열렸으며, 도시 문화를 향유하는 엘리트층 -부르주아-가 이 공유된 임시 사회에서 모임을 만듬으로써 이러한 "세련된[cultivated]" 맛은 농촌 농민의 삶과 낭만적 만남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는 기술적인 이야기도 함께 드어간다. 산업 혁명은 증기 기관과 철도 네트워크 같은 교통 수단의 발전을 가져왔고, 이는 유럽의 중산층이 더 저렴한 값으로 이들 축제로 떠나는 여행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재즈 페스티벌 역시 20세기 중반 유럽에서부터, 역시 도시 엘리트들의 교양있는, 소박한 경험에서 개발되었다. - 하지만, 아주 중요한 몇가지 변환점이 생겼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은 유럽 문화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믿음을 망치고 훼손시켰다. 이는 전통적인 농가 생활의 "좋은 옛 시절"이 완전히 사라졌으며, 악몽과도 같았던 민족주의의 결과는 모든 이들의 전통 민속 문화에 대한 노스탤지아를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재즈, 북아메리카에서 생거난 소외된 하층민의 이 장르는 '정통' 민속문화를 바랬던 유럽 중산층에게 새로운 매력적인 포커스를 제공했다. 크리스틴 맥기 [Kristin McGee], 네덜란드의 대학인 Rijksuniversiteit Groningen의 재즈 학자이자 교수인 그는 초기 유럽의 재즈 페스티벌의 특성을 "음악의 부흥과 야외의식"이라고 설명했으며, "전후세대의 매혹"과 "훼손되고 상상으로만 남게 된 목가적 세계에 대한, 모던 시대의 새로운 노스탤지어"를 변화된 미국 아티스트로 인해 보충하였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일어난 Côte D'Azur등의 이벤트를 예시로 들며, 유럽 최초의 재즈 페스티벌을 리조트 등에서 일어난 "개인 재산의 범위 내에서 일어난 작은 스케일의 실외 이벤트"라고 설명했다. 이후 재즈 페스티벌은 더 개방되고, 저렴해지고 실용화되었으며, 초기 모습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원시주의, 목축업 등에 대한 낭만적인 신화를 가진 엘리트들의 현상이었다. 역설적으로 이들이 도시적인, 세계주의와 밀접하게 엮여있으면서도 말이다.

 

재즈 음악 축제는 1950년대 미국에서 개발되었으며, 1960년대 초 이들 페스티벌은 민속 축제의 요소를 포함하게 되었다. 미국의 '민속 부흥운동'은 1940년대에 시작되었으며, 특히 반전쟁[anti-war], 시민권리운동[pro-civil rights], 반핵[anti-nuclear] 환경문제[environmentalist] 와 노동문제[pro-organized labor] 등의 정치적 운동에 배경을 제공하였다.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와 피트 시거[Pete Seeger]와 같은 음악가들은 젊은 정치 활동가들에게 상징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이는 이후 90년대의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모습과 비슷하다. 초기의 민속 부흥운동은 정치적 시위장이나 커피 하우스에서 결성되었지만, 60년대에 이들은 충분히 스스로 음악 페스티벌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가장 최초의 포크 페스티벌은 이미 만들어진 재즈의 기반을 사용했다. 가령 1959년 시작한 Newport Folk Festival는 1954년의 Newport Jazz Festival에서 유래되었다.

 

미국에서, 이 두 재즈와 포크 페스티벌은 전후세대와 냉전세대의 매력을 주었으며, 특히 전통, 농촌과 원시적인, 목가적인 삶을 꿈꾸는 "진짜" 미국인 음악가들을 매혹시켰다. 흥미롭게도, 민속 음악축제는 민속 부흥운동의 절정기, 팝과 록 음악이 민속 음악 및 음악가들을 흡수했을 때에 등장하였다는 것이다. (1966년 Manchester Free Trade Hall에서의 "Judas!"가 일어난 해. 밥 딜런이 첫번째로 전기 기타를 사용한 공연을 벌인 때.)











 

 

 

페스티벌, 팝이 되다

 

60년대는 음악 축제가 변화된 중요한 시기였고, 이들은 점점 몇가지 방법에서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이들은 점점 엘리트 문화에서 대중문화로 바뀌었으며 중간 계층의 폭넓은 접근을 보여주었다. 전후 경제성장과 미국의 자동차 문화가 성장하며 페스티벌은 일부 노동계급의 음악 애호가들을 끌어들일 수 있게 되었다. 페스티벌은 점점 더 어려졌으며, 혹은, 오히려 젊은 이들에게 부합되는 형식으로 변했다. 많은 역사가와 사회학자들은 50년대와 60년대가 '청소년 문화'가 처음 등장한 시기라고 말한다. "베이비 붐"시대는 이 10년동안 자신의 청춘을 보냈으며, 이들은 시민 투쟁과 같은 문제, 베트남 전쟁과 다른 반문화 운동을 통해 사회적, 문화적 그룹으로 활기를 띄게 되었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은 또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패션, 음악, 음식, 문학과 같은 문화적 문제의 주변에서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정치적 권한을 가지게 된 것처럼 경제에서도 그들의 존재가 나타나게 되었다. 20년간의 경제 성장은 '젊은이'들의 등장으로 인한 새롭고 유망한 소비시장 덕분이었다.

 

그리고, 음악 축제는 점점 '팝 문화'화되어갔고, 새로운 페스티벌은 신종 관객들의 취향을 대상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가장 먼저 시작할 수 있는 예로 몬테레이 팝 페스티벌 [Monterey Pop Music Festival], 1967년 6월 캘리포니아 몬테레이에서 열린 이 축제는 적어도 25,000명의 관객을 불러모은 걸로 알려져있다. 페스티벌 프로그램은 누구, 그러니까 락, 포크와 팝을 위한 누구들이었다. 'The Who, Janis Joplin, Otis Redding, Jimi Hendrix, The Mamas & The Papas, Simon & Garfunkel, the Grateful Dead' 같은 인물들. 또한 이 페스티벌은 지미 헨드릭스의 기념비적인 퍼포먼스, 기타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른 뒤 마구 부숴서 관객들에게 던지는 행위로 미국 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공연이다. 몬테레이는 미국 'Summer of Love'의 시작으로 거론되고는 하며, 히피 운동이 한창일 때, 수천명의 젊은이들이 그의 "turn on, tune in and drop out."이란 멘트에 큰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60년대 락 음악에 있어 가장 잘 알려진 공연은 전설적인 우드스탁 뮤직 페스티벌이다. 이는 1969년 8월 15일에서 18일까지, 뉴욕 북부에 있는 600에이커의 목장에서 진행되었다. 이 페스티벌은 원래 수익을 목적으로 한 사업 투자로 기획되었고, 4명의 투자자에 의해 조직된 이 사업은 150,000명에서 200,000명 정도의 티켓 수익을 통해 흑자를 거둬들일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그 주 마지막에는 거의 50만명의 사람들이 나타났으며, 이들에 의해 페스티벌은 거의 강제적으로 무료 이벤트가 되었고, 마지막 순간에는 페스티벌을 위한 울타리가 제거되기도 했다. (걱정할 것은 없는 게, 이미 186,000명의 티켓을 팔아치웠었다) 총 32팀의 공연자들로 모인 이 페스티벌은 몬테레이 페스티벌에서 볼 수 있었던 많은 인물들, Joan Baez, Creedence Clearwater Revival, Jefferson Airplane, Sly & The Family Stone and Crosby, Stills, Nash & Young 등이 있었다. 인구 과밀과 악천후에도 우드스탁은 이후의 잘 짜여진 축제들과 다른 진정한 락 페스티벌 중 하나로 거론되었다. 지미 헨드릭스의 "The Star-Spangled Banner"의 싸이키델릭 연주는 우드스탁에서의 60년대의 결정적인 순간 중 하나였다.

 

우드스탁과 몬테레이 공연 이후, 60년대 말을 맞이한 음악 페스티벌은 단지 대중문화만이 아니라 대규모로 기능하게 되었다. 67년부터 대중 음악 페스티벌의 수는 폭발할듯이 늘어났으며, 관객의 수요는 지속적으로 조직의 기대 용량을 넘어섰다. 1967년부터 열린 영국의 Isle Of Wight Festival의 경우 이 축제의 70년대에 관객들은 우드스탁의 규모를 훨씬 넘어선 60만에서 70만 사이의 관객을 끌어모았다. 페스티벌은 5일동안 The Doors, Joni Mitchell, Miles Davis 등을 포함한 55명의 공연자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역시나, 이들 주최자는 수익이 흑자를 넘어서고 티켓 행사로 이를 관리하기에 커졌다고 판단하면 '비영리'를 선언하였다. 이 결정에 의한 경제적 손실은 지역주민에 의해 보장된 다수의 관리 봉쇄로 이어졌으며 결국 이 페스티벌은 2002년까지 잠시 중단되었다.

 

Isle Of Wight festival의 어려운 시기에도 실외의 팝과 락 페스티벌은 70년대에 걸쳐 번창해나갔다. 영국에서는 첫번째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첫 이름은 Pilton Pop, Blues & Folk Festival)이 등장하였고, 미국에선 Summer Jam at Watkins Glen ('73)이 60만 이상의 관객을 불러모았다. 다른 주목할만한 페스티벌은 Strawberry Fields Festival ('70, Canada), Sunbury Pop Festival ('72 - '75, Australia), Festival Rock Y Ruedas De Avándaro ('71, Mexico), Ozark Music Festival ('74, USA), Florida Sunfest ('77, USA) and Canada Jam ('78) 등이 있다. 또한 이 시기는 영국에서의 무료 음악축제 운동가 출현한 때이며, 그 예로는 the Windsor Free Festival ('72 - '74)와 the Stonehenge Free Festival ('74 - '84) 등이 있다. 지방 자치에서 다른 조직들은 종종 입장료를 요구하지 않았고, 전부 자율 기부에 의존하였으며 자원봉사자는 관객과 공연자와 함께 일했으며, 쪼그린 상태로 작업했다. 여러 면에서 이 무료 페스티벌은 90년대 초 영국의 UK free party scene의 정신적 스승이나 마찬가지였다.

 

 

 

해가 계속되며 이들 페스티벌은 젊은 관객에게 현재 인기를 끄는 것들을 반영하도록 했다. 그러나 하나의 장르는 페스티벌 무대에서 항상 배척받곤 했다. 바로 디스코 말이다. 이 사운드는 이미 70년대 초에 번성하여 중반에 국제적인 현상으로 자리잡았다. 아마 이 이유는 당시 유행한 다른 음악보다 더욱 댄스 음악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댄스플로어 위의 디스코 집단은 축제 무대에 집어넣기에는 특색이 너무 강했을 것이라 본다. 또 디스코의 이미지는 당시 음악 축제의 목가적인, 원시적인 분위기와 잘 맞지도 않았다. 이 장르는 첫째로 도심의 흑인과 라티노, 게이, 성전환자들에게서 번성한 장르로, 도시를 배경으로 한 음악이었다. 또한 어쩌면 디스코의 인종적이고 성적으로 소외된 댄서들의 성향과 관계가 있을 수 있다. 페스티벌이 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며 성장하는 동안, 이들의 첫번째 관중은 항상 백인 중산층 이성애자였다. 이 자유주의, 섬머 오브 러브의 "러브 앤 피스"의 정치적 방향과 다른 반문화 운동은 평등주의와 끌어안기에 대한 헌신을 이끌어내었고, 이는 다른 많은 이벤트보다 소수자들의 호응을 이끌어내었지만 핵심 관객층은 적거나 많거나 항상 19세기 클래식 음악 축제의 사회적 계급[hierarchy]에서 비롯되었다.

 

80년대에 들어서도 음악 축제의 인종과 성적 모습이 변하지는 않았지만, 사회 계급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이 10년간의 주요 변화 중 하나는 헤비 메탈 (이후 글램 메탈)이 페스티벌에 스테이지에 나타났다는 것이며, 이는 더 많은 노동계급들을 끌어모은 것이다. 영국에서 하드락/헤비메탈을 안은 첫번째 페스티벌은 Monsters Of Rock (1980 - 2006)과 the Heavy Metal Holocaust ('81) 등이 있다. 허나 역시나 더 많은 대중 중심의 음악 페스티벌이 다음 세대를 이어나갔으며 Glastonbury Festival, Reading & Leeds Festival, the Milton Keynes Bowl concerts등이 흥행하였다. 바다건너 미국으로 가보자면 the US Festival of '83 (애플사의 창립자 스티브 워즈니악이 자금을 댄) 이 역사적으로 여러 장르를 혼합한[cross-section] 페스티벌을 제공하였으며 이는 4가지의 다른 장르를 하루 건너 하나씩 하는 방식으로 제공되었다. 뉴웨이브 데이, 헤비메탈 데이, 록 데이와 컨트리 데이로 말이다. 이 중 뉴웨이브 데이는 관객층이 드문드문 있었던데 비해 헤비메탈 데이가 꽉 들어찬 것은 미국의 주류 음악 층이 변화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전자 음악의 시대

 

마치 디스코가 70년대 페스티벌에서 거의 보이지 않았던 것처럼, 미국에서 만들어진 하우스와 개러지, 일렉트로와 테크노 같은 다른 포스트-디스코 음악 또한 실외 페스티벌에서 찾아보긴 어려웠다. 그리고 두번째 섬머 오브 러브가 일어났다. 88년 애시드 하우스가 런던, 셰필드, 버밍엄, 맨체스터를 비롯한 여러 영국 나이트클럽에서 돌풍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89년 초반, 이들 클럽은 지역 경찰의 압력을 받게 되었고 이들 이벤트는 도심 장소로서 수용 용량을 초과하게 된다. 그래서 여름이 도착하자, Biology, Eclipse, Energy, Back To The Future 와 같은 프로모터들은 인근 시골이나 쓰이지 않는 산업단지, 당시 막 완성된 M25 오비탈 고속도로 등을 야외 레이브의 거점으로 삼으려 한다.

 

많은 목격자에 의하면, 이 이벤트는 다른 나이트라이프 무대의 관객들보다 더 인종적으로, 성적으로 자유로운 관객들을 이끌어내었다. 이들 레이브는 일반적인 현대의 음악 페스티벌과 여러 면에서 달랐지만, 그들은 확실히 축제를 좋아하는 분위기, 젊은 관객들, 아웃도어로서의 장소와 긴 진행시간 등으로 페스티벌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참으로, 많은 해설가들이 '67년의 사랑의 여름에서 아웃도어 팝 페스티벌이 번성한 것과 '89년의 아웃도어 레이브의 폭발적인 성장이 유사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오래 가지는 못했는데-영국 정부가 '92년과 '93년에 야외 레이브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새로운 법을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불법으로 규정된 야외 이벤트가 한 시기에 계속되는 동안, 프로모터들 또한 나이트클럽에서 나왔고 이들 이벤트를 유럽 대륙으로 옮겼다. (그 당시는 법이 레이브를 붙잡기 이전이었다) 혹은 이 이벤트를 '합법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한편 같은 시기 베를린에서는 장벽이 무너지는 독일의 통일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고, 급진적인 사회의 변화와 함게, 흥미진진하고 또한 무서운 분위기가 두껍게 깔려있었다. 전자음악은 이미 독일 베를린 밤의 중요한 부분, 대부분의 80년대에서 일어난 인더스트리얼과 일렉트로락, 신스팝과 EBM같은 음악들이 막 태어나려는 하우스와 테크노 무대의 비옥한 토양이 되어주고 있었다. 89년 여름, 페스티벌키드 그룹 중 하나는 음악 퍼레이드의 형식을 한 정치적 데모를 베를린 Kurfürstendamm의 swankiest 쇼핑센터에서 해 보자는 생각을 한다. 이들의 정치적 모토는 "평화, 사랑, 팬케이크"였고, 150명의 사람들이 이 퍼레이드를 즐겼다. 그리고 이것은 러브 퍼레드의 시발점이 되었다. 다음 여름, 장벽이 무너지고 통일이 이루어진 해에 이들은 두번째 이벤트를 했고, 이들의 이상적인 모토는 "미래는 우리 것이다"였다. 이들은 2000명의 관객을 모았다. '97년, 러브 퍼레이드는 100만명의 참여와 함께 퍼레이드 경로의 마지막을 Siegessäule ("Victory Column")의 Tiergarten park로 변경하였다.

 


 

러브 퍼레이드가 공식적으로는 정치적 시위라고 선전되었지만, 이는 실지로는 대규모 전자 음악 페스티벌에 가까웠다. 항상 러브 퍼레이드는 정치적인 행동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 이들 비평은 주최측이 정치적 시위로서의 이점를 활용해 공공 시위법이 그들의 파티에서의 안전과 청소를 책임지게 했다는 것이다. 이제 허가를 얻기 위해, 조직들은 러브 퍼레이드가 정치적 시위가 확실한지를 입증해야 했으며 그 대표인 Dr. Motte는 퍼레이드를 정치적 발언대와 함께 할 것이라고 했다. 물론 이는 일반적으로 비꼼조[tongue-in-cheek]의 연설만 가득했다. 그럼에도 "재미"란 그런 맥락에서 정치적이었다. 동독 GDR의 엄격한 사회통제와 감시 이후, 냉전과 파티, 음악과 춤은 살아남고픈 젊은이들을 위한 긴급한 제스쳐였던 것이다.

 

91년부터 지금까지 Mayday에서 열린 러브퍼레이드와 스위스에서 열린 스트리트 퍼레이드[Street Parade], ('92 - present) 는 90년대와 00년대 초반까지 유럽에서 가장 큰 페스티벌 중 하나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들 규모도 그렇지만, 이들은 도심 페스티벌이란 점에서 다시 한번 유의미한 것이었고-이들은 도시의 중앙에 자리를 잡았으며, 이들의 이상향은 기술 시대의 미래[techno-futuristic]와 산업 이후[post-industrial]의 시대였다. 이는 90년대에 진행된 도시 기반 전자 음악의 모습 중 하나로써 Sónar ('94, Barcelona), Time Warp ('94, Mannheim), I Love Techno ('95, Ghent), Awakenings ('97, Amsterdam and Rotterdam), Hradhouse Festival ('98, Boskovice) 등이 그 추세를 이어나갔다. 일부 도시는 처음에는 이들 이벤트를 성가시고 자원을 낭비하는 것으로 봤으나, 다른 이들은 이들을 관광과 수입의 잠재적 원천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태도 변화는 특히 2000년대 초반에 드러났는데, 도시의 '창조 도시' 모델로의 재개발과 함께 페스티벌과 같은 창조적인 예술 축제가 어려운 주변에게 돈과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는 이상적인 방법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몇 년 동안 소나[Sónar]와 같은 멀티미디어 전자 음악 페스티벌은 "도시 예술 축제" 모델에 따라 개설되었다. 가령 Club Transmediale ('99, Berlin), DEMF/Movement (Detroit, '00), MUTEK (Montréal, '00), EXIT (Novi Sad, '00), Decibel Festival ('03, Seattle) 등 말이다. 물론, 이는 비도시권 야외 페스티벌이 사라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1995년에는 우크라이나의 KaZantip 페스티벌뿐만 아니라 캐나다 토론토의 Destiny/World Electronic Music Festival의 등장이 있었다. 이 시대에 시작된 야외 페스티벌은 시대를 거쳐 현재까지도 활성화되어있으며, 그 예로는 포르투갈의 Boom Festival (since '97), 독일의 Melt! in Ferropolis ('98)와 일본 니이가타의 Labyrinth at Naeba Greenland ('01) 등이 있다.

 

이와 함께 다른 종류의 도시적인, 페스티벌 성향의 전자 음악 이벤트가 생겨났다. 그것은 업계 컨퍼런스이다. 마이애미의 Winter Music Conference (WMC)는 81년 최초로 생겨났으며 Amsterdam Dance Event는 96년 시작했다. 다른 전자 음악 페스티벌, Sónar, Club Transmediale, MUTEK 같은 곳이 컨퍼런스의 요소를 추가하는 동안 이들 이벤트는 음악 업계의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시장 박람회, 토론 패널, 워크샵, 강의, 데모 시연 그리고 신기술 시연과 네트워킹 이벤트 등의 구조로서 기능하였다. 저녁에는 그 이벤트가 벌어지는 도시 주변에서 다양한 나이트클럽이 특정 레이블이나 스타일, 아니면 단지 새로운 재능을 보여주곤 했다. 물론 이런 이벤트가 산업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하였지만, 주최측은 음악 팬들이 참석하고 이들이 댄스플로어를 채우고 비싼 음료를 사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리고 이들 컨퍼런스는 새로운 형태의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파티를 개발하는 경향이 있었고, 함께 응집하여 어떤 형태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도심 전자 음악 축제와 유사한 면이 있었다.










 

EDM 페스티벌의 성장

 

그렇다면 오늘날의 초거대 EDM 페스티벌은 어떠한가? 이들은 70년대의 팝/락 페스티벌붐과 90년대에 아웃도어 레이브가 폭발한 동안, 프로모터들은 재빨리 이들 성장하는 페스티벌을 자본화시켰으며 이를 통해 시장에 새로운 EDM 페스티벌이 넘치게 만들었고, 이들을 거대화시켜 (그리고 더욱 더 늘어나게 된 입장료와 함께) 이들 공연을 엄청난 '슈퍼스타' 라인업과 더욱 더 늘어난 음식, 음료와 기념품으로 가득하게 만들었다. 최근 몇년동안 미국에서의 EDM 페스티벌의 폭발은 70년대 팝/락 페스티벌과 아주 유사하다. 2011년의 한 예로, EDM 페스티벌은 Electric Forest, Escape From Wonderland, Dancefestopia 등의 새로운 이벤트를 포함해 마구 성장하고 있었다. "EDM 형식"의 음악 페스티벌의 출현과 폭발적 확장은 크게 북미의 현상으로 보인다. 다른 곳에서는 -특히 유럽과 오세아니아- 전자 음악 페스티벌은 끊을 수 없는 역사적 연결고리를 20세기 후반의 팝/락 페스티벌과 레이브 스타일 야외 이벤트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곤 한다.

 

그러나 세계화가 발생한다. 유비쿼터스 및 즉각적인 텔레커뮤니케이션의 시대에 -다국적 기업과 초국가적 정치에 힘입어- EDM만큼 큰 것도 국가적 경계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이미 북미의 EDM 페스티벌과 거대한 세계적 전자 음악 페스티벌의 사이에서 여러 페스티벌이 교차 작용을 통해 성장한 것으로 보이며, 그 예로 벨기에에서 성장한 Tomorrowland가 2013년 TomorrowWorld festival을 애틀란타에서 연 것과 지난 2년간 Electric Daisy Carnival가 런던, 멕시코 시티를 명단에 추가한 것이 있다. 글로벌 게더링은 2001년 영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글로벌 음악 축제 브랜드'라는 소개와 함께 거의 모든 대륙에서 개최되고 있으며 최근 미국 스타일의 EDM페스티벌을 향하고 있다. 음악 페스티벌 개최자가 국제적인 "브랜드"를 얻고 빠르게 성장하는 것은 그 자체로 주목할만한 발전이다. 그러나 골치아픈 것은 대기업이 이들 페스티벌 회사를 집어삼키려는 것이며 (SFX가 ID&T를 손에 넣고, 여러 미국 EDM 페스티벌과 나이트클럽, 그리고 비트포트를 가지고 있는 것 말이다) 음악 축제가 독과점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마치 음악 레코드 산업이 그랬던 -글로벌 "메이저" 레이블이 전세계의 음반 시장을 손에 다루는- 것과 유사하다.


 

 

어떤 경우, 새 미국 EDM 페스티벌이 어떻게 새롭게 페스티벌 경험에 접근하는지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여전히 존재한다. '00년대 중후반 이후, 북미 지역의 전자음악 페스티벌은 콘서트화[concertization] 되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새로운 형태의 전자 음악 페스티벌이 대규모 팝/락 콘서트의 여러 면면을 차용하고 있으며, 이는 전자 음악의 공연 및 경험에서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전자 음악 페스티벌과 같은 이벤트의 예는 매우 일찍부터 존재했지만, 이들은 나이트클럽의 댄스플로어를 유지하는 관객들에게 전자 음악 경험에 대한 이상적인 개념을 심어주려 하였다. 그와 함께 그들은 DJ의 퍼포먼스나 관객의 반응과 상호 작용, 비주얼 영상이 얼마나 적절하거나 세련되는지, 어떻게 이를공공/주류화 할 것 인지,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어떤 기대를 했다.

 

70년대 디스코는 페스티벌 무대에 올라올 수 없었지만, EDM은 성공한 듯이 보인다- 어쩌면 더 정확하게는, EDM은 새로운 것이며 대부분의 미국의 전자 음악 카테고리는 근본적으로 오늘날의 야외 대형 이벤트에서 형성되었다. (90년대 중반부터 EDM이라는 단어를 매우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던 대중 음악 학자들 때문에 이는 몇가지 혼란과 당황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새로운 형태의 EDM 음악가들은 대부분 DJ 부스의 관행을 포기하고 팝이나 록 스테이지의 형태를 채용하였다. 록 콘서트처럼 진행되는 짧고 강도높은 뮤지컬 세트, 실물보다 큰 무대의 개인과 시각적 스펙터클에 끝없이 투자하는 것(애니매트로닉스, 비디오 프로젝션, 복잡한 LED 스크린 배열과 불꽃놀이 등)을 통해 "뇌 녹는" 소리들과 감각의 과부하를 동반하는 것이다.

 

한 방법으로, 이는 사회학자들이 "축제화[festivalization]된 사회"라 말하는 것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페스티벌 모델이 문화활동의 모든 종류에 적용되는 경우 시 당국 사이의 예술 축제의 유행으로 보일 수 있고, 현재의 실패한 지역 정책의 은탄환이 될 수도 있다. 이 전략의 기본 개념은 다음과 같은데, 1) 경제적으로 취약한 지역에 관광과 소비를 이끌어내며 2) 조직에 대한 이익을 집중할 수 있으며 (모든 것이 잘 된다면, 상대적으로 신속하고 유리한 보수가 나올 수 있다) 3)"문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친숙함을 제공하여 창조적인 사람들에게 안정적으로 기금을 조달할 수 있고, 자금을 지원하는 기관 및 투자자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전자 음악 페스티벌이 점점 일반적인, 투자자 친화적인 EDM 모델을 따르게 될 경우, 이는 이미 우리가 메인스트림 미디어에서 얻은, 단순히 같은 균질화된, 무해한, 대량 소비 문화의 재생산으로 끝날 위험이 있지 않은가? 관객과 예술가의 다양성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전자 음악 페스티벌이 대중 문화에 새로운 것을 기여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을까?

 

북미의 EDM 축제는 음악 페스티벌의 역사에 좀 더 오래 등장할 것이지만, 최근의 반복은 새로운 형태의 대중 문화를 - 더 상업화되고 선전에 의해 움직이는, 그러나 또한 더 접근성있고 아마도 민주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일부 비평가들은 이 매머드급 페스티벌이 수십년동안 그 주변을 둘러싼 더 작은, 깨지기 쉬운 언더그라운드 무대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걱정하는데, 이는 EDM 페스티벌이 새로운 전자 음악 팬을 끌어들이는 기본 벡터가 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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